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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필진 칼럼/여행/캠핑/맛집

잊혀져가는 동네의 옛이야기 성북동 1 - 신정은의 건축학 개론

 

 

오늘은 동네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성북동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처음에 제가 이 동네를 알게 된 건 집에서 삼청동으로 가는 꼬불꼬불한 길들을 다니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인연이 되었어요.

오픈한 지 일주일이 된 어느 홍차 카페에 단골이 되면서 그 동네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결국 매주 주말마다 성북동 구석구석을 누비며 관광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씩 성북동의 매력을 알게 되니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졌어요.

  

 

영화 건축학개론에 건축학과 교수의 수업시간에서처럼 자신이 사는 동네에 대한 탐험이에요.

좀처럼 관심 갖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모를 동네에 대한 옛이야기를 찾아 나서다 보니

많은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시대가 주었던 공간의 가치는 현재의 제게 추억을 만들어 주었어요.

 

처음 성북동을 접했을 때는

'세상에 이런 부자동네, 부촌'이라는 인식으로 눈이 휘둥그레졌는데요.

성북동은 한남동과 함께 부촌의 상징이 된 지 오래된 동네에요.

높은 담장과 삭막한 거리, 고급승용차들의 행렬들.

처음 그 동네를 들어섰을 때 문화적 충격이었어요.

대원각(지금의 길상사) 주변 일대를 비롯해 고급빌라들이 들어선 곳에서는

그 출입문이 어디인지를 한참 찾았거든요.

 

 

 

 두어달을 그렇게 다니다 또 잘못 들어간 어느 골목길을 보았을 때 또 다른 문화를 느꼈어요.

뚝방촌, 판자촌이라 불리는 차가 다닐 수 없는 좁은 산동네가 이어졌어요.

그 산동네와 이어진 곳에 서울성곽이 만나고, 하늘과 가까운 집들이 있었어요.

또 다른 성북동에서 바라본 풍경은 가슴이 뻥 뚫리고 마음이 아린 느낌이었답니다.

그곳의 이웃에게는 온정이, 사람의 냄새가 났습니다.

부촌에서 온정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사람 자체를 만나볼 수 없어서였어요.

물론 다른 방법으로 그들도 정을 나누어주고 있겠지만 제가 본 판자촌은 조금은 친숙하고

조금은 인간적인, 그리고 아픈 동네였습니다.  

 

 


동네의 골목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어요. 이길 저길 어느 길을 갈까 고민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한번 들어서면 다시 그 길로 나와야 하는 경우가 일수이기 때문에 길 선택을 잘 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길들이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으니

어느 길을 가도 상관없었지요.

  

 

 

 저처럼 성북동을 사랑하는 사람 한 분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은 성북동을 매 계절마다 와서

보고 스케치를 한다고 합니다. 변하는 성북동은 언제고 같은 모습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해요.

또 한 분은 매 계절 와서 한 집의 문을 사진을 찍는데 점점 페인트칠이 벗겨지는 것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다고 해요. 아직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제 성북동 사랑은 조족지혈이지만

제 마음속은 으뜸이랍니다.

 

 

 

동네 주민 할아버지의 말처럼 성북동은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던 곳입니다.

예술을 사랑한 간송 전형필 선생을 비롯해 최순우, 이태준, 김환기, 만해 한용훈, 정지용,

박두진, 박목월 등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분들의 터가 기록되어 있어요.

지금은 가옥을 부수고 집터만 남아있는 곳이 있지만

그런 곳에는 조그맣게 비석에 새겨져 있어 그곳의 터를 실감 나게 한답니다.

 

  

 

 

최순우 옛집은 미술사학자이자 제4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 최순우가 살던 집인데요.

평생 박물관에 근무하며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국내외 전시를 통해 일반에 널리 알리고 박물관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에요.

당대의 문화예술가(김환기, 장욱진, 이경성 등)와 교류하며 문화예술계를 이끌었어요.

 

이 집은 1930년대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소박하고 정갈한

한국미를 아낀 혜곡의 안목이 담겨 있어요.

사랑방에는 1976년 이사 오던 해 친필로 쓴 '두문즉시심산' 편액이 걸려있어요.

'문을 닫으면 이곳이 곧 깊은 산중이다'라는 뜻이에요.

이곳에서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알리는 글을 썼어요.

 

 

 

 

 

최순우 옛집(혜곡최순우기념관, 등록문화재 제268호)

2002년 우리나라 최초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보전 의지로 지켜진 시민문화유산 1호에요.

개인과 기업의 성금으로 문화와 자연유산을 지키는 내셔널트러스트운동으로 매입하여

복원보수를 거쳐 2004년부터 일반에 공개하고 있답니다.

 

저도 성북동을 돌아다니며 이곳을 알게 되어

이런 좋은 일을 하는 곳에 동참하고 싶어 가입했답니다.

최순우 선생의 친필원고, 사진, 유품 등 소장품을 상설전시하고,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서 해마다 봄가을에 문화 프로그램을, 가을에는 특별전을 하고 있답니다.

 

다음은 수연산방인데요. 우리나라 현대 소설의 바탕을 이룬 상허 이태준이 1933년 짓고,

1946년 북한으로 가기 전까지 살던 집입니다.

이곳에서 <달밤> <가마귀> <복덕방> 같은 작품을 썼어요.

'수연산방'이란 이름을 짓고 살며 느낀 소소한 행복과 이야기를 수필로 남겼어요.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순박, 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그런 전통을 표현함에는 돈보다 일에 정을 두는 이런 구식 공인들의 손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임으로… 이런 노인들은 왕십리 어디서 산다는데 성북동 구석에를 해뜨기 전에 대어 와서 해가 져 먹줄이 보이지 않아야 일손을 뗀다. 젊은이들처럼 재빠르진 못하나 꾸준하다. 남의 일 하는 사람들 같지 않게 독실하다. 그들의 연장은 날카롭게는 놀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 내키는 대로 힘차게 문지른다.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 이들의 손에서 제작되는 우리 집은 아무리 요새 시쳇집이라도 얼마쯤 날림기는 적을 은근히 기뻐하며 바란다.

 

<목수들> 중에서

 

 

조선 시대 건축의 순박함을 닮은 나이 든 목수 다섯 사람이 지은 안채는

목수의 우직함과 상허의 안목이 들어있어요.

집을 짓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문향루, 죽향루, 상심루라고 쓴 편액을 걸어두었어요.

지금까지 전하는 상허가 쓰던 책장과 곁에 두고 보던 해석이 이 집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태현가'로 지정(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11호, 1977)되었던 명칭이

납월북작가 해금조치로 1988년 제 이름을 찾았어요.

지금은 '수연산방'이란 이름으로 유족이 찻집을 운영하며 개방하고 있어

사진 찍으며 쌍화차 한잔 마셨는데 분위기만큼 맛도 일품이었답니다.

 

신문기사 속 성북동

 

성북동 김수영씨가 각 동의 청년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사립 삼산의숙을 창설한 취지는 다음과 같다. "….. 오직 우리 동북동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유래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여 교육이 미칠 겨를이 없었거니와 오늘날의 문명의 다툼을 돌아보면 대풍조가 한반도에 점점 파급하여 전방인사가 급급하게 분투하야 도시나 시골에 학교건물이 계속 세워지거늘 오직 이 동네는 오히려 잠잠하여 …. 이즈음에 삼산의숙이 처음으로 건립하니 어두운 동네 하늘에 등대가 되어 빛을 발하고 무지한 사람들을 깨울 길이 나타났도다."

 

<황성신문, 1908.07.18>

 

 

 

성북동 골목탐방은 다음 편에 더 이야기하려고 해요.

그간 제가 본 성북동을 소개하려니 할 말이 끊이질 않으니 말이에요.

사람이 숨 쉬는 마을, 예술이 깃든 마을, 옛이야기가 살아있는 동네 그 무엇으로 표현해도

조금은 부족해요. 직접 만나고 느껴야 '아~' 하고 알게 되실 거예요.

 

 

 

 

 

Tip! 서울의 옛 정취가 남아있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서울의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지역 중 하나인 성북구 성북동. 혜화문, 길상사, 옛 정취가 깃든 골목길 등을 볼 수 있어 도보여행지로 인기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