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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금융 경제/금융경제 상식/용어

경제학 역사 교실 ③: 세계 대공황

 

경제학 역사 교실 그 세 번째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지난 2주 간에 걸쳐 경제학의 큰 두 줄기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에 대해 알아보았죠?

 


 

이번 주부터는 세계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사건이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있었는지 알아볼게요! 이번 주 주제는 전세계 산업 경기의 침체를 야기했던 세계 대공황입니다.

 

 

 

세계 대공황 이전에는 세계 1차 대전이 있었습니다. 4년 간의 세계 대전을 통해 참전국의 모든 자원이 전쟁에 동원됨으로써 오랜 기간 엄청난 파국을 초래했고, 이는 종전 후 인구와 산업생산설비를 평시체제로 복귀하도록 조정하는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곧바로 대공황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1차 대전의 여파로 축적되어 온 경제 문제가 대공황을 야기한 것이죠.

 

 

1차 대전이 끝나고 유럽은 미국에 의지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교전국들이 농업부문에서 제 위치를 잃으면서 농산물 수입을 늘리자 미주대륙과 호주 등 신세계에서는 곡물농업 및 축산을 대규모로 증대하게 되었죠. 그렇지만 유럽이 농산물 생산을 재개하자 전 세계적으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농업이 침체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의 빚은 쌓여만 갔죠.

 

전쟁 중 공급애로에 따른 물가상승도 문제였습니다. 전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1920년 이후까지 지속되어 그 중 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러시아,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렸습니다. 독일의 경우 1922 8월부터 1923 11월까지 월 335%의 천문학적 비율로 물가가 상승했죠. 한편으로는 배상금과 점령비용이 국제수지 적자규모를 확대시켜 마르크화의 가치를 떨어뜨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자 때문에 통화공급이 급증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결국 인플레이션은 민주주의를 붕괴시키고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나치)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하는 시기였습니다. 승전으로 나라 전체가 들떠있었고, 라디오, 자동차의 대량 생산과 보급, 헐리우드 영화산업도 급성장했죠. 부동산과 주식투기 열풍도 있어서 대공황 전에는 주식시장 붐이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시장과열을 우려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긴축통화정책을 추진했고, 이 정책은 1929 10월 주가 폭락을 야기했습니다.

 

 

 

 

192910미국 뉴욕 주식시장의 주가 대폭락은 자본주의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1930년부터는 혹독한 은행공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애초에 내재되어있던 금융위기가 있었고 이 위기가 동부 유럽, 영국으로 확대 전파되는 과정에서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죠. 은행의 위기는 금융제도의 신용창조기능을 약화시키고 소비자의 현금선호를 부추겨서 통화량의 감소를 야기했습니다. 이에 따른 이자율 상승은 기업에게 피해를 주었고, 실물경제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1931년 미국의 통화긴축은 공황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디플레이션 정책은 자산가치 하락과 실질부채증가를 수반했고, 한편으로는 실질임금 상승과 실업증가의 메커니즘으로 불황의 골을 깊고 길게 했습니다.

 

1933년 말까지 약 4년간 지속된 대공황은 자본주의 전체의 공업생산력 약 44%, 무역 약 65%가 저하했고 가업파산 수십만 건, 천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를 발생시켰습니다. 공업생산뿐 아니라 농업과 금융 부문의 타격도 매우 커서, 농산물의 가격폭락, 각국의 금본위제 정지 사태가 잇따라 일어났죠.

 

 

 

대공황이 세계 경제를 강타한 후 각 국가별로 대공황에 대처를 하고 극복했습니다. 모든 국가들의 대처 방안과 그 결과를 다루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의 사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미국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개입하여 경제를 장악하면서 뉴딜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Recovery, Relief, Reform이라는 슬로건으로 3R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는데, 크게 농업정책과 공업정책, 구제정책을 펼쳤습니다.

소비능력을 초과한 생산과잉이 대공황을 부추겼기 때문에 법을 통한 생산과잉을 억제하고 정부보조를 통해 농산물 가격을 상승시켰고,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을 통해 실업자수를 감소시켰습니다. 또 국가적으로 대규모 토목사업 등을 벌여 실업자를 구재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뉴딜정책의 시행으로 미국 경제는 호전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경제 활성화나 실업 감소를 지속적으로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 독일


독일은 세계 1차 대전 패전국으로 막대한 보상금과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벅찬 상태였습니다. 디플레이션과 실업률은 상당한 문제였죠. 그렇지만 히틀러의 나치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반전됩니다. 조세감면, 수의계약, 농업보조, 동시장 개입 등 직접통제수단을 대대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경제 회복을 하기 위해 힘썼죠. 그렇지만 그리 큰 효과가 없었고 결국에는 군수물자 생산에 주력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식민지를 확보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려는 나치즘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 영국


영국은 대공황 이전부터 이미 높은 실업에 시달리며 총파업을 겪었습니다. 금본위제로 회귀한 것과 파운드의 가치 유지를 위해 쓴 긴축정책 때문이었죠. 결국 금본위제를 포기해야 했고,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했습니다.

 

# 프랑스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덜 공업화되어 있는 국가였습니다. 1930년대에도 농업비중이 여전히 컸고 세계 경제에서 고립된 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공황 전파가 늦었지만 일단 대공황이 프랑스를 강타하자 회복이 매우 더뎠죠. 금을 많이 보유한 프랑스는  늦게까지 금본위제에 머물렀는데, 프랑스와 금블록 회원국들은 금본위제를 고수하느라 불황을 극복하는 것이 힘들었 습니다.

1936년에야 금을 포기했고, 회복은 1938년에야 시작되었지만 때가 너무 늦었죠.

 

 

미국과 독일, 영국과 프랑스의 예에서 살펴보았지만, 세계 대공황에 대한 각 국가들의 대처는 대체로 실패하거나 중간 정도 성과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정부의 개입을 통해 세계 무역이 축소되고 블록 경제(정치적·경제적으로 관계가 깊은 여러 국가가 결집하여 역내의 경제교류를 촉진하는 반면, 역외국가들에 대해서는 차별대우를 취함으로써 폐쇄적이고도 유리한 경제관계를 맺는 경제나 경제권)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부 정책으로 성과를 거두는 것이 어려워지자 독일을 비롯한 이탈리아, 일본은 대외 침략으로 활로를 찾으려는 야욕을 품게 되었죠. 세계 2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따로 알고 있는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은 사실 세계 대공황이라는 경제문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답니다. 새삼 경제가 얼마나 우리 삶에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느껴지네요.

 

다음주에는 대공황 이후 다시 한 번 세계 경제를 공포에 빠뜨렸던 1, 2차 오일 쇼크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